현금으로 본 한국경제 77년: 화폐발행잔액의 변화 [통계로 보는 한국경제사 #11]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발행잔액은 현행 원화 기준으로 4,300만원에 불과하였다. 이후 전쟁과 화폐개혁, 산업화와 고도성장,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5만원권 도입과 코로나19를 거치면서 2025년 말 화폐발행잔액은 210조7천억원으로 증가하였다. 77년 동안 명목금액으로 490만 배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큰 증가율만으로 우리 경제에 돈이 지나치게 많이 풀렸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폐발행잔액에는 경제규모 확대와 물가 상승, 인구 증가, 고액권 도입, 국민의 현금 보유 성향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화폐발행 역사는 경제성장뿐 아니라 화폐제도와 지급결제 방식이 변화해 온 과정이기도 하다.
정부 수립 당시의 화폐와 전쟁기의 통화팽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아직 한국은행이 설립되기 전이었다. 당시에는 조선은행권이 주요 화폐로 사용되었다. 1948년 말 화폐발행잔액은 현행 원화 기준 4,300만원이었고, 1949년에는 7,500만원으로 증가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화폐발행 체계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그러나 한국은행 설립 직후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파괴되고 물자가 부족해진 가운데 정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화폐 발행과 중앙은행의 신용공급이 확대되면서 물가가 급등하였다.
화폐발행잔액은 1950년 말 2억3천만원에서 1951년 말 5억6천만원, 1952년 말 10억1천만원으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불과 2년 만에 네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 시기의 발행잔액 증가는 경제성장보다는 전쟁비용과 재정적자, 생산 위축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쟁 중 북한군이 조선은행권을 불법으로 발행하는 일이 발생하자 정부와 한국은행은 1950년 9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과 교환하고,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단계적으로 정지하였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화폐의 신뢰와 통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두 차례 화폐개혁과 현재 원화체계의 확립
전쟁으로 통화량과 물가가 급등하자 정부는 1953년 2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기존의 ‘원’을 ‘환’으로 바꾸고 100원을 1환으로 교환한 화폐개혁이었다.
이 조치는 지나치게 커진 화폐 액면을 줄이고 전쟁으로 심화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폐단위가 100분의 1로 줄었지만 국민이 보유한 돈의 실질가치가 100분의 1로 줄어든 것은 아니다. 화폐의 표시단위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6월에는 다시 ‘환’을 ‘원’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이 실시되었다. 당시 정부는 민간이 보유한 퇴장자금을 금융권으로 끌어내 경제개발에 필요한 산업자금으로 활용하고, 과잉통화를 흡수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금 동결에 따른 경제활동 위축과 국민의 반발이 나타나면서 일부 조치는 곧 완화되었다. 퇴장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전환한다는 당초 목표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1962년 화폐개혁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원’ 단위의 화폐체계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글에 사용된 1962년 이전 화폐발행액은 당시 원과 환 단위를 그대로 표시한 금액이 아니라, 화폐개혁에 따른 단위 변경을 반영해 현행 원화 기준으로 환산한 장기계열이다.
산업화와 함께 커진 화폐 수요
1960년 말 화폐발행잔액은 146억원이었다.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화폐발행잔액도 본격적으로 증가하였다. 1970년 말에는 1,589억원, 1980년 말에는 2조385억원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경제성장으로 생산과 소득, 소비와 상거래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임금근로자와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현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활동에 필요한 화폐 수요도 증가하였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고액권에 대한 수요도 상승하였다. 1972년에는 5천원권, 1973년에는 1만원권이 발행되었다. 특히 1만원권은 이후 30년 이상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액권으로 사용되었다.
화폐발행잔액은 1990년 말 8조2천억원, 2000년 말 21조4천억원으로 증가하였다. 1990년대 이후 신용카드와 계좌이체가 확산되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뱅킹과 전자결제가 보편화되었지만, 경제규모와 물가가 상승하면서 전체 화폐발행잔액은 계속 증가하였다.
5만원권 도입 이후 빨라진 증가세
2009년 6월 5만원권이 도입된 것은 우리나라 화폐발행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73년 1만원권이 도입된 이후 경제규모와 물가는 크게 상승하였지만 최고액권은 36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결과 고액 현금거래와 보관에 많은 수의 1만원권이 필요하였다.
5만원권 도입 전인 2008년 말 30조8천억원이었던 화폐발행잔액은 2009년 말 약 37조3천억원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2010년 말 43조3천억원, 2015년 말 86조8천억원, 2019년 말에는 125조7천억원으로 증가하였다.
이 같은 증가를 5만원권 도입만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규모 확대와 물가 상승, 저금리 기조, 예비적 현금 수요 증가 등이 함께 작용하였다. 다만 5만원권이 고액 현금의 보관과 이동을 편리하게 하면서 가치저장 목적의 현금 수요를 뒷받침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5만원권 발행 이후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는 환수율이 1만원권 등 다른 권종에 비해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된 점은 5만원권이 일상 거래보다는 가치저장 및 자산보관 수단으로 널리 축장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현금 보유의 역설
코로나19가 확산된 2020년에는 비대면 거래와 카드·모바일 결제가 크게 증가하였다. 일상생활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빈도는 이전보다 낮아졌으나 화폐발행잔액은 오히려 빠르게 증가하였다.
2019년 말 125조7천억원이었던 발행잔액은 2020년 말 147조6천억원, 2021년 말 167조6천억원, 2022년 말 174조9천억원으로 증가하였다. 감염병 확산과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가계와 기업의 예비적 현금 보유가 증가했고, 저금리로 현금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현금의 ‘사용’과 ‘보유’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상적인 지급수단으로서 현금의 역할은 축소되더라도 비상시를 대비하거나 자산을 보관하는 수단으로서 현금 수요는 늘어날 수 있다.
2025년 말 화폐발행잔액은 210조7천억원으로 사상 처음 210조원을 상회하였다. 이는 2024년 말보다 약 9.1% 증가한 규모이다. 최근의 현금 수요는 경제규모 확대뿐 아니라 5만원권을 중심으로 한 가치저장 수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경제규모와 비교하면 어떻게 달라졌나
화폐발행잔액은 명목 금액만으로 비교하면 거의 모든 시기에 증가한다. 물가와 경제규모가 장기간에 걸쳐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금 수요가 경제규모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려면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화폐발행잔액 비율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각 연도 말 화폐발행잔액을 해당 연도의 명목 GDP로 나누어 GDP 대비 비율을 계산하였다. 이 비율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연도별 등락이 컸지만 대체로 4~6%대에서 움직였다. 전쟁과 전후 복구, 높은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이 함께 나타나면서 화폐발행잔액과 명목 GDP의 증가 속도가 시기마다 달라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비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였다. 1980년대 초 4%대였던 비율은 1990년대 들어 주로 3~4%대에서 움직였고, 2000년대 후반에는 2%대 중반까지 낮아졌다. 산업화와 금융발전으로 명목 GDP가 빠르게 커진 반면, 신용카드와 계좌이체 등 비현금 지급수단이 확산되면서 현금 수요는 경제규모보다 상대적으로 느리게 증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009년 5만원권 도입을 전후로 흐름이 반전되었다. GDP 대비 비율은 2010년 3.1%에서 2015년 5.0%, 2019년 6.2%로 높아졌다.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에는 7.2%로 크게 상승했고, 2021~2024년에는 7%대 중반을 유지하였다가 2025년에는 7.9%까지 높아져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승은 일상적인 현금 결제가 늘었다기보다 5만원권을 중심으로 가치 저장과 비상시 대비 목적의 현금 보유가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화폐발행잔액의 증가가 곧 물가 상승이나 과잉유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가는 예금통화를 포함한 전체 통화량, 신용공급, 총수요와 공급 여건 등의 영향을 받으므로 화폐발행잔액은 M1·M2와 구분해 해석하여야 한다. 또한 이 비율은 연말 시점의 잔액과 연간 흐름인 GDP를 비교한 지표라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화폐발행잔액은 전체 통화량과 다르다
화폐발행잔액은 한국은행이 발행한 은행권과 주화 가운데 환수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금액을 말한다. 여기에는 금융기관이 보유한 현금도 포함된다.
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통화량은 현금뿐 아니라 은행의 요구불예금, 저축성예금과 각종 금융상품을 포함한다. 따라서 2025년 화폐발행잔액 210조7천억원을 ‘시중에 풀린 전체 돈의 규모’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전체 통화량은 화폐발행잔액보다 훨씬 크다.
화폐발행잔액은 가계와 기업 등이 보유하는 현금뿐 아니라 금융기관의 현금 수요와 중앙은행의 발권정책을 보여 주는 지표로 이해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현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1948년 4,300만원이었던 화폐발행잔액이 2025년 210조7천억원으로 증가한 과정은 한국경제의 성장과 인플레이션, 화폐제도와 지급수단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전쟁과 통화팽창은 1953년 화폐개혁을 불러왔고, 1962년 화폐개혁을 통해 현재의 원화체계가 확립되었다. 산업화 이후에는 경제활동 확대에 따라 화폐 수요가 증가했으며, 5만원권 도입 이후에는 가치저장 수단으로서 현금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었다.
카드와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되었다고 해서 현금이 곧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래수단으로서의 현금 비중은 낮아지고 있지만, 경제적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수단과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현금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민간 디지털 지급수단이 확산되더라도 현금은 상당 기간 디지털 결제를 보완하는 지급수단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 및 참고문헌
-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 「한국은행 계정―화폐발행잔액」 및 「국민계정―국내총생산(명목)」
- 한국은행, 「화폐연대자료―1950년~1952년」, 「화폐연대자료―1953년~1962년」 및 「화폐연대자료―1962년~1970년」.
- 한국은행 디지털아카이브, 「1953년 긴급통화·금융조치」 및 「1962년 긴급통화조치」.
-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각 연도.
- 배영목(2016), 「통화량과 통화 구성의 장기 추이, 1905-2014」, 『경제사학』 제40권 제2호, 187~217쪽.
주: 1962년 이전 화폐발행액은 화폐단위 변경을 반영해 현행 원화 기준으로 환산한 수치이며, 연도별 수치는 연말잔액 기준이다. 통계 그래프는 한국은행의 공식 연속 통계가 집계된 1950년부터 작성되었다. GDP 대비 화폐발행잔액 비율은 GDP 통계가 편제되기 시작한 1953년부터 각 연도 말 화폐발행잔액을 해당 연도의 명목 GDP로 나누어 계산하였다.
작성자
장광수|송현경제연구소
댓글
댓글 쓰기